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카 제국 (문단 편집) == 평가 == 위와 같은 잔인한 만행들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잉카 제국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소규모의 부족 중심 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남미 지방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벌하고 중앙집권적인 제국으로 건설한 것, 그리고 전국 곳곳에 널찍한 도로를 뚫고 수로들을 개수한 것, 뛰어난 건축 기술로 험준한 산악 지대에 아름다운 도시들을 세우고 문명을 꽃피운 것 등 대체적으로 좋은 것들이 현재 잉카 제국의 주된 이미지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스페인 제국]]이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한 짓들이 너무나도 악랄했기 때문에 잉카 제국의 악행들이 묻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미 원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매개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은 '잉카의 후손'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스페인의 압제자들에 맞서 싸웠고, 몇 백여년에 걸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잉카의 신년의식이나 전통들을 보존하면서 잉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잉카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희석될 수 있었고, 심지어 일부는 미화되기까지 하면서 현재 잉카 제국에 대한 평가는 원주민들이 세운 남미 최대의 대제국 정도로 어느 정도 좋은 편이다.[*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흐르면 사람들의 적대감은 희석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1300년대에 [[고려]]에 공녀를 요구하고 각종 재물을 수탈해갔던 [[몽골]]에 대한 적대감이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거의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다만 무조건 맞는 말은 아니다. 서아시아에서는 아직도 몽골을 싫어하는데, 대표적으로 [[하자라족]]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양국 모두에서 핍박받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몽골족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동유럽도 비슷하지만 그래도 서아시아가 철저히 갈려나간 것에 비하면 조금 대충 갈려나간 편이었다.] '잉카 제국의 적통'을 주장하는 [[페루]]에서는 당연히 잉카 제국을 자랑스러운 자신들의 역사로 생각하고 있다. 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몇 천년에 걸친 문명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대했던 제국의 고향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제국이 멸망하고 약 200여 년이 지난 1700년대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최후의 [[사파 잉카]]인 [[투팍 아마루]]의 혈족을 주장한 투팍 아마루 2세가 등장하여 잉카의 후예를 자칭하면서 사람들을 이끌었던 적도 있고, 이 '잉카의 후예'라는 타이틀로 몇 만명에 가까운 페루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페루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잉카 시절의 영광에 대해서 어느 정도 향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페루 학계 측에서는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가 페루 영토 안에 있고, 자국민들 중 케추아족의 구성 비율이 50%가 넘는 것을 근거로 페루가 남미에서 가장 정통성있는 잉카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칠레]]나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등 여타 남미 국가들은 잉카 제국이 단순히 페루 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와 민족들에 걸친 다민족 제국이었으므로 오직 페루만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만큼 잉카 제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괜찮은 것에는 제국이 멸망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무굴 제국]], [[청나라]], [[조선]] 등 아시아 지역의 전통적인 국가들은 온갖 부정부패에 찌들은 채로 몇 십여년 간 외세에 잠식당하다가 결국 타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이권의 각축장이 되어버리는 등 꽤나 추한 모습으로 역사에서 퇴장당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아예 '완전히 새로운 문명과의 조우'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멸망했고, 듣도보도 못한 신무기를 사용하는 적들에게 기술의 완벽한 열세, 그리고 구대륙에서 넘어온 전염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즉 멸망할 만한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당신이 [[아타우알파]]라고 생각해보자. 몇 십만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당신이, 이상하게 생기기는 했다만 200명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패하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타우알파 황제가 스페인 군인들을 처음 마주할 때 방심한 것은 멍청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망해가는 국가들이 [[국가 멸망 테크]]를 시전하고 있을 때 보통 황족들이나 귀족층들이 새로운 침략자들에 빌붙어 기생하는 것과는 달리, 잉카 제국의 황족들은 산속의 빌카밤바로 도망가면서까지 끝까지 스페인의 압제에 저항했으며 최후의 황제인 [[투팍 아마루]] 역시 당당한 태도로 마지막까지 스페인에 대항하다가 의연한 죽음을 맞았다. 이같은 태도는 훗날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었고, 몇 백년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통치 속에서도 잉카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현대 세계인들이 잉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보통,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에 [[마추픽추|도시]]를 지은 위대한 건축 문명''', 혹은 '''황금이 넘쳐났던 미지의 풍요로운 국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같은 선콜럼버스 시대의 문명인 [[마야 문명]]이나 [[아즈텍 제국]]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교한 달력을 제작했다거나 정글 속의 문명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잉카의 달력은 예상 외로 마야의 그것만큼 정확하지는 않았으며 잉카 제국 영토의 대부분은 정글이 아니라 안데스의 산악 지방이었다. 또한 황금에 관해서라면 분명 잉카 제국에는 한때 보물이 많았던 것은 맞다.[* 쿠스코의 대신전인 코리칸차에는 황금으로 만든 옥수수밭과 숲, 그리고 순금 독수리나 라마 등 동물들까지 있었고, 외벽에는 황금으로 만든 두꺼운 벽돌을 두르고 두터운 순금 띠를 둘러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황제가 대놓고 방 2개를 가득 채울 만한 황금을 바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통치기에 잉카 예술품들의 문화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던[*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꽤 쓸만한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잉카 제국에서 가져온 여러 황금 장신구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여러 유럽인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예를 들어 [[알브레히트 뒤러]]는 [[브뤼셀]]에서 열린 전시회를 참관한 뒤 '''이토록 내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본 적이 없다'''고 찬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시회가 끝난 뒤에는 몽땅 다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버렸다.] 스페인 관리들이 눈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있는 금붙이란 금붙이는 모조리 쓸어가버렸고, 이를 모두 녹여버린 다음 [[금괴]]로 주조해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버렸다.[* 이런 풍조는 심지어 190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백인들은 잉카인들이 어딘가 비밀 도시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숨겨놓은 황금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국을 샅샅이 뒤졌으며, [[마추픽추]]가 발견된 것도 사실상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참고로 이같은 [[판타지]]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많은 미디어에 [[엘도라도|은밀하게 숨겨진 전설의 황금도시]] 같은 것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는 문화적 가치를 알았어도 어쩔 수 없이 금괴로 만들어야 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피사로도 그러했고.] 이 덕분에 스페인에는 몇 만톤에 달하는 금과 은이 그대로 유입되었고,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고혈을 짜낸 덕분에 한시적으로는 유럽 최강대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스페인은 국내 제조업이 부실한 관계로 거의 모든 생필품을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는데, 그런 이유로 잉카 같은 신대륙에서 힘들게 가져온 황금과 은을 죄다 물건을 산 값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와 독일 같은 외국으로 보내버렸다. 그래서 신대륙에서 들어온 황금과 은도 정작 스페인 국내 경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이 시절에 잉카 제국의 황금 유물들이 대부분 소실된 덕에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금 유물들은 스페인에게 넘겨지지 않은 극소수의 유물이거나 후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다만 최근들어서는 [[아즈텍 제국]]과 함께 잉카 제국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전처럼 무작정 백인 침략자에게 당한 무고한 제국이라는 환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앞서 말했겠지만 잉카 제국 역시 굉장히 잔혹한 방식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인근 부족들에게 강한 반감을 샀고, 인간 북을 만들어 전시하는 등 매우 잔인한 국가였다. 잉카인들이 워낙 잔혹했고 복속된 부족들이 워낙 잉카에 대한 반감이 강했기에 몇 백명도 안되는 스페인인들이 이를 이용해서 거대한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제아무리 총기와 말을 가지고 있던 [[피사로]] 일행이었을지라도 170여 명 정도밖에 안되는 인원으로 몇 만에 달하는 잉카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사로는 잉카 제국에 반감을 가진 부족들을 자신들의 품으로 회유했고, 사실상 이들의 힘을 빌려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잉카인들이 무작정 쳐들어가서 모두 죽이고 노예로 삼았다는 것은 아니다. 잉카인들은 일단 군사적인 방법보다는 외교술을 선호했고, 평화적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다만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한없이 잔인해졌을 뿐이다. 그외에도 잉카인들은 [[어린이]]들을 산지의 추운 동굴로 끌고가 그대로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현대의 기준에서 굉장히 야만적인 풍습들도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아프로-유라시아에서는 몇 백년 전에 사라진 [[인신공양]] 풍습도 있어서 황제의 장례식 등 중요한 행사들에 수많은 사람들을 [[순장]]해 바치는 등 좋은 풍습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